조리원 생활

2주간의 조리원 생활이 이제 만 4일밖에 남지 않았다. 이곳의 생활은 수유-유축-마사지-밥의 무한반복.
그래도 마음만 먹으면 놀거리도 많고 은근 도망갈 구멍을 만들면 없지만도 않으므로 갈수록 적극적으로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

보호기가 없으면 직접수유가 불가능한 가슴형태라 쓰고는 있는데 재질은 같아도 아무래도 젖병에 비해 써야 하는 힘이 많다 보니 좋아하진 않더라. 영 안 되겠다 싶으면 유선만 잘 뚫어놓고 3개월 정도는 유축완모...라는 험난한 길을 가야 할지도. 그렇다고 완모를 고집하는 건 절대 아니고 그냥 순조롭게 양이 늘어서 이 정도면 먹여 살릴 수 있겠다 싶더라. 외출하거나 여행 갈 때는 분유를 먹이겠지만.

아기를 먹이는 과정에서 발견하는 내 몸의 새로운 기능이 너무나 놀랍다.
처음엔 10ml를 겨우 짜내던 것이 이제 밤을 지내고 나면 유축량이 100ml를 넘어간다.와 나에게 이런 생산기능이 있다니 진짜 신기해..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너무나 막연해서 나에게는 닥쳐오지 않을 것만 같은 순간이 있지 않나. 최초의 그것은 수능이었고 두 번째는 결혼이었고 마지막은 출산이었는데 셋 다 너무 순식간에 지나가 버려서 지금도 그게 현실이었나 싶다. 그런데 모유 생산의 기능은 하루에도 몇 번이나 경험하는 것이니 초짜 엄마인 나로서는 하루하루가 놀라울 수밖에. 
하지만 몇 시간 지나면 뜨끈뜨끈한 돌덩이처럼 변하는 가슴은 그닥 달갑지 않구나. 딱히 젖몸살이라고 할 건 아니지만 왼쪽 등의 한 포인트가 간헐적으로 아파와서 자다가도 신랑에게 문질러 달라고 할 때가 있다. 차차 나아져야 할 텐데.

상대적으로 저렴한 조리원을 선택하면서 마사지를 최대로 받고 나오겠다는 결심을 했는데, 착실히 실천 중이다. 39주까지 8-9킬로 정도 늘었는데 이미 거의 다 빠진 상태. 붓기도 많이 가라앉아서 딱 봐도 종아리는 확연히 가늘어졌고 더이상 코끼리발도 아니다. 배도 이제 거의 다 들어간 듯한 느낌. 아직 운동은 안 하고 있지만 일단 여기서 기본 형태를 만들어 놓고 집에 가면 스트레칭, 요가->필라테스로 운동강도를 높일 생각이다. 몸짱으로 거듭나리! 

드디어 이름이 정해지면서 어제 출생신고를 완료했다. 4개의 후보 중 다행히 내 기준 상위 2개 중 하나가 최종 낙찰되어 매우 흡족. 아직 입에 붙지 않아 신랑은 콩돌이라고 자꾸 부르지만 연습해야지. 여기서는 세뿅이라고 불러야겠다. 마지막자가 한참동안 결정되지 않아 언니가 그렇게 불렀거든 ㅎ
가정양육수당과 전기요금 할인 신청도 하고, 시 인구증가에 기여한 바, 아토팜 바디워시와 로션세트를 선물 받음. 안 사길 잘했다.
여기서 짬 날 때마다 필요한 물건을 구입해서 집에 택배가 산더미처럼 쌓였다고 하는데 우리가 돌아갈 때는 대충 청소해 두겠지. 스쳐가는 육아템들은 적극적으로 중고나라 이용 중. 

결정적으로 세뿅이는 예뻐졌다!
이번 생은 망한 줄 알았더니 현재로서는 매우 평균적인 아기의 귀여움은 갖추고 있어서 나름 이쁨 받을 수 있을 듯.


39주 3일, 크리스마스 이브의 이브의 아기

12월 22일, 전날 너무 일찍 먹기를 중단한 탓인지 배가 고파서 일찍 깼다. 전날 해놓은 알배기배추 겉절이+된장 비빔밥을 쓱싹 해치우고 좀 사부작거리다가 다시 자고 일어난 게 11시였던가. 씨리얼과 치즈, 사과로 가볍게 점심을 먹고, 씻고, 병원에 갈 준비. 정기검진이긴 하지만 지난주에 빠르면 1주일 내로 낳겠다는 말을 들었던 바, 혹시 몰라 차에다 출산가방은 모두 실어 두었고, 혹시 몰라서 음식물 쓰레기도 정리하고, 혹시 몰라서 설거지도 하고, 혹시 몰라서 빨래도 다 걷어서 개어두고. 1월에 집으로 돌아가도 큰 무리가 없도록 웬만한 것들은 처리하고 집을 나섰다. 일주일 내내 손걸레질을 중심으로 한 집청소에 매진하였기에 집 컨디션도 매우 좋음. 

39주차라 일단 태동검사를 하고 진료를 받는데, 내진 시 자궁은 2센치 조금 더 열린 상태. 지난 주와 달리 체중이나 머리크기, 배둘레는 모두 괜찮은 수준이었고 다리가 길어서 나오기에도 유리한 체형이라는 게 담당의의 설명이었다. 근데 잠깐, 분비물이 양수 같기도 하다면서 무슨 테스트지로 검사를 하더니 양수가 살짝씩 샌다고, 이슬도 나온 거라고 입원을 하란다. 너무 태연하게 입원이라는 단어를 내뱉길래 아니 의사양반 그게 무슨 소리요? 라는 말이 목구멍으로 나올 뻔하다가 "입,, 입원이요?"라고 반문.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고. 아니 진짜 내가 둔한 게 아니라 분비물은 항상 많았기 때문에 그게 이슬인지 양수인지 헷갈린단 말이지. 그게 동시에 섞여 나오면 색깔이나 점도로 판단할 수도 없으니.
오후 4시 반 즈음에 가족분만실에 누웠고, 다행히 그날의 당직의는 내 담당의. 오호호호, 역시 우린 운이 정말 좋구나- 했다. 

일단 양수가 샜기 때문에 항생제를 맞고 촉진제 약하게 투입. 다만 저녁시간 이후로는 촉진제 투여를 안 한다고 하네. 그래도 난 축복받은 유전으로 언니가 초산 진통 5시간의 기록을 가지고 있는 터라 22일에 태어나겠구나 확신하고 있었다. 6시 즈음에 아이가 내일 나오면 배가 많이 고플 텐데 저녁식사를 하겠냐고 하길래 거절했는데, 아 그래도 힘 떨어지면 안 된다고 먹길 권하다가 내진을 해보더니 3센치 넘게 열렸다며 다시 먹지 말자고 한다. 
태동기를 달고 있어서 계속 누워 있으니 생리통 같은 요통이 이어진다. 너무 답답해서 화장실을 한 번 다녀와서 잠시 앉아 있었더니 그 통증조차 사라져서 이건 누워 있어서 아픈 것이었나 싶을 정도. 그 와중에도 자궁문은 멋대로 열려서 4센치를 돌파했단다. 아프진 않았지만 그래도 양막이 터지면 순식간에 진행될 수 있으니 무통을 맞자고 하네. 뭐 그렇다면야 맞아야죠- 하고 무통시술을 한 게 8시 반. 국소마취 후 무통관을 삽입했는데 난 주사를 잘 맞는 편이라 이것도 매우 수월하다고 느낌. 뚱뚱한 배를 둥글려서 무릎을 잡는 자세가 제일 힘들었다고 하면 말 다했지.
10시 내진 결과 5센치 열림. 무통 후 하반신에 오한이 느껴져서 바들바들 하고 있으니 신랑이 내 발치에 앉아서 한참을 손으로 데워준다. 

그런데-
무통 후 순조롭던 진행이 멈춰버린 것이 문제. 밤이라 촉진제도 안 쓰니 이건 뭐 방법이 없는 거다. 
제일 걱정되는 건 무통이 이렇게 잘 듣고 있는데 최대 10시간이라는 약빨이 떨어지고+촉진제가 들어가면 나는 시간은 시간대로 까먹고 출산의 고통을 쌩으로 느껴야 하는가, 라는 것. 너무 고요한 것도 싫어서 kbs 클래식 fm을 틀어놓고 밤을 지샜는데 거의 아무도 들여다 보질 않아서 이 걱정으로 잠이 들었다 깼다를 반복했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그렇게 불안할 수가. 


12월 23일, 새벽 5시가 좀 안 되어서 항생제 다시 투여. 
그 때 물어보니 무통은 아기가 나올 때까지 계속 놔주니까 걱정하지 말란다. 휴- 한숨 돌렸네.
이제 당직인 담당쌤이 퇴근할 때까지 나오기만을 바랄 뿐이다. 

새벽 6시 40분. 간만에 내진을 하는데 7-8센치 열렸다고. 다만 아기가 아직 안 내려왔다며 안을 휘휘 저어 주시네. 
무통주사를 처음 맞을 때도 약간 그랬는데 새 것으로 갈고 나니 매스꺼운 증상이 심해져서 결국 위액을 토하고 말았다. 
괜찮아, 안 아픈 거에 비하면 이 정도는.

당직의 퇴근시간이 가까워 오니 한 번 들러 보신다. 내진 결과, 아기는 문 앞까지 내려왔고 7센치 가량 열린 자궁문만 다 열리면 된다고. 왜 스탭들마다 하는 말이 다른 거지... 
뭐 어쨌든. 촉진제를 잠깐 맞다가 진행이 너무 빠른 것 같다며 다시 끊었는데 문이 쑥쑥 잘 열리긴 하나 보다. 엉덩이가 묵직해지고 똥꼬에 압박이 점점 거세지면서 배와 엉덩이에 절로 힘이 들어가는데 아무때나 힘주면 안 된다며 호흡 연습을 하란다. 그 와중에 아기바구니가 분만실 안으로 입장하고.

9시를 넘기자 힘주기 연습을 시작하는데 하필 압박이 없을 때만 골라서 연습을 시키니... 간호사쌤이 없을 땐 옆으로 돌아누워 압박이 올 때마다 연습을 하라는데 옆으로 누운 상태에서 힘을 줘봤자 크게 연습이 될 리가 없지.
그래도 그 과정을 몇 번 반복하다가 때가 되었는지 담당쌤이 아닌-이미 퇴근- 수술방 의사가 들어온다. 그리고 압박이 올 때마다 힘주기 힘주기. 고통이 없으니 힘주기 어려울 것 같지만 엉덩이에 엄청난 압박이 있기 때문에 타이밍을 절대 놓치진 않는다. 정말 오랜 변비 끝에 딱딱하게 굳어버린 숙변을 제거할 때의 느낌이랄까. 진짜 똑같아. 
연습할 때는 압박이 없어서 결과가 별로였지만, 실전에선 한 세 번 힘 줬더니 힘 빼세요! 하면서 뭔가 후루루루룩 나온다. 그런데 숙변이 아니라 머리도 나오고 팔도 나오고 다리도 나오고 태반도 나오고 뭐가 되게 많이 나오네. 곧바로 후처치에 들어가고 나는 어, 끝났나 하고 얼떨떨.... 오전 10시 29분. 입원부터 낳기까지 18시간이니 오래도 걸렸다. 아프지 않은 게 더 중요하니까 괜찮긴 하지만. 
조금 있다가 씻고 수건에 싸인 땡땡 불어터진 아기가 내 옆에 왔는데, 와- 이게 내 배에서 나온 거라고? 숙변이 아니라 인간 아기네.. 하고 진심으로 신기해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출산의 고통이란 걸 1도 모르니 이렇게 애가 쉽게 나오는 거였나 싶은 거지. 신랑은 그 장면을 사진과 동영상으로 남겨 놨는데, 우리의 투샷이 찍힌 영상은 kbs 클래식fm이 BGM으로 깔려 있다. ㅋㅋㅋㅋ

출산 후 2시간, 입원실로 올라가는데 휠체어를 태워 주시네. 자연분만하면 1시간 만에 걷기도 한다더니. 
태어나서 처음으로 휠체어를 타고 병실로 올라가서 정말이지 오랜만에 밥이란 걸 먹었다. 아아- 진짜 배고팠어.
그런데 반도 먹기 전에 다 토하고 말았... 신랑도 점심 도시락 사러 나가고 없는 시간이었는데. 아침에 토한 적이 있으니 구토용 비닐봉지를 만들어 놓고 나간 게 다행이지. 다만 식사와 함께 진통제가 포함된 약도 뺏겨버리고 곧 다가올 고통의 시간을 불안하게 기다려야 한다는 게 슬플 뿐..... 이었는데 안 아팠다! 
나는 도대체 무슨 몸이 이런 몸이 다 있나. 출산에 최적화된 몸인가.

물론 내가 느끼지 못할 뿐 내 몸은 그 과정을 모두 체험했기 때문에 손발이 코끼리처럼 부어오르는 것까지 피할 순 없었지만.
그래도 출산 후 만 하루하고도 반을 지난 지금 이시간까지 별다른 고통은 느끼지 못하고 있다. 

아기는, 음.. 신생아실에만 있고 방으로 데려오진 못하기 때문에 오늘 모유 수유 연습하려고 내가 2번 내려간 것 빼고는 아무도 가까이에서 안아보지 못했고 너무 우리가 무심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들여다 보지 않아서 좀 미안할 지경. 조리원 가면 접촉하는 시간이 늘어날 테니 정이 좀 붙겠지? 얼굴 보면 신기하긴 한데 쟤가 내 자식이 맞는지 모르겠고 뭐 그렇다.


정리하자면
1. 진통이 오면 모를 수가 없다고 하는데 틀렸다. 누가 평소 생리통 정도의 아픔으로 병원에 전화를 할까. 아프다고 하기도 민망할 지경인데.. 정기검진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과연 언제 병원에 갔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
2. 무통천국이라고들 하는데, 무통 맞기 전의 지옥을 모르는 나로서는 천국인지 뭔지도 판단 불가능. 그냥 실제로 느낀 고통이 없으니 매우 감사하다고 생각하지만.
3. 3대굴욕이라는 관장, 제모, 회음부절개는 그저 의료행위일 뿐. 내 담당의는 여자고 분만 시 의사는 남자였지만 전혀 신경 안 쓰임. 다만 의사 본인이 신경을 쓰는 것인지 배려를 하는 것인지 후처치를 하는 동안 간호사에게 쓸데 없는 아저씨 유머를 치고 있다.  
4. 모성애는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뱃속에 있을 때도 이 안에 들어있는 게 진짜 인간 아기가 맞나 싶었지만 얼굴을 보니까 더 어색해!! 처음 보는 애잖아! 
5. 이런 엄마도 있습니다. 아.. 엄마라는 호칭도 어색해..
6. 눈 뜬 모습을 출생 이틀째 처음 봤는데 아빠랑 빼박이네... 이번 생은 망한... 아, 아닙니다.


39주, D-6. 출장일정

자잘한 일들을 모두 처리하고 택배도 모두 받아 출산가방을 완성했으며
이제 매일매일 집안 청소와 정리, 운동-이라고 해 봐야 계단을 오르는 것과 주차장 걷는 정도-만 하는 며칠이다.
빠르면 이번주- 라는 의사의 말에 걸레질을 열심히 해서 하루가 다르게 집이 깨끗해지고 있지만 아직 아이는 나오지 않았고.
오늘 새벽에 아랫배가 생리통처럼 아픈 가진통 정도가 가볍게 있었지만 허리부터 시작한다는 진진통은 기미가 없다.

공교롭게도 신랑의 출장일정이 1월 7일에 잡혀서 5일 정도 집을 비우게 될 것 같은데 조리원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오는 것까지 함께하려면 내일까진 자연분만이 완료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미 지금이 목요일 오후 5시... 뭐 사람 일은 모르는 거지만 그렇다는 거다. 조리원은 아기아빠를 제외한 사람의 출입, 면회가 완전히 금지되어 있어서 내일을 넘기면 며칠 정도는 나 혼자 조리원 생활을 해야 할 듯. 어차피 하루 종일 같이 있을 건 아니지만 잠까지 혼자 자려면 조금 쓸쓸할지도.
하지만 아기용품 쇼핑을 할 수 있는 면세점 찬스가 생겼으니 뭘 준비할까 체크해 보는 게 좋겠다.

오늘 아침엔 결전을 준비하는 용사처럼 일찍 일어나서 의식을 행하듯 아침밥을 준비했건만 이리도 잠잠하다니.
최후의 만찬을 즐길 기회가 아직 남아 있다면 뭘 먹을지 고민해 봐야겠다.
싱싱한 스시를 먹고싶긴 한데 연말이라 예약이 잡힐런지...

38주, D-12. 임박?

금요일마다 있는 정기검진.
배변활동이 매우 활발한 덕인지 옷 무게의 오차도 있었겠지만 체중은 오히려 줄어서 희희낙락.
그러나, 초음파 볼 때. 머리는 안 커졌는데 배둘레는 왜 이렇게 커졌지? 이놈 체중이 왜 이렇게 늘었지? ㄷㄷㄷㄷㄷ
38주 2일에 3.3킬로가 되면 어쩌자는 거냐. 답은 그저 빨리 낳는 것 뿐인가?

몇 번을 더 할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이 첫 내진이었는데 후기를 보니 정기검진 때 하는 내진은 힘만 빼면 좀 불편할 뿐이지 별 거 아니라고 해서 전혀 걱정 안 하고 임한 결과, 역시나 그랬다. 담당의의 감상은 "오우, 준비가 많이 되어 있는데요? 1센치 열렸고 12월에 낳을 수 있겠어요." 라고 한다. 
아기도 아래로 많이 내려와 있고 골반도 좋아서 빠르면 1주일 내에 진통이 올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쾌재를 부름.
내 경우 처음 이거다!-이게 진짜 진통이구나- 싶은 이후로 10분 간격까지 반나절 이내가 될 수 있으니 그 진행속도를 고려하면 10분 간격일 때 병원으로 달려오라, 라고. 너무 늦게 가서, 혹은 진행이 너무 빨라서 무통 못 맞았다는 사람 얘기도 가끔 있고 해서 칼같이 지킬 예정. 운동 많이 하셨나 봐요~ 라고 해서 사실 전혀 그렇지 않은데 이런 얘길 듣는 걸 보면 내 몸은 참 착하구나 싶고. 이제 정말 운동다운 운동을 하면 담주에 보겠구나 싶어서 기분이 좋더라. 

출산가방은 어젯밤에 거의 다 싸서 차에 넣어두고, 이제 소소하게 소모품들만 주문(샴푸)/구입(기초화장품)하고 도착(바디워시, 가글, 튼살크림)하면 되는데 왜 이 타이밍에 일이 들어오는 것이지? 하나는 작년에 해본 일이고 쉽고 납기도 월요일이라서 받아 놨고, 하나는 거절. 부탁인데 갑님들, 제발 나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말라.... 난 돈을 너무 사랑해서 거절하기가 너무 괴롭단 말이야... 하지만 빵꾸 나는 것도 무서워. 운동도 해야 되고 운동을 겸한 정리와 걸레질도 해야 한다고.

이상 지금도 윗배가 돌덩이처럼 딱딱한 만삭 임산부가.
다음 글은 나름 여유로워서 애 낳고 돌아올게요!, 또는 출산후기가 되면 좋겠다.

38주, D-13

드디어 한달짜리 프로젝트가 끝났다. 이제 좀 살겠네. 
이렇게 출산이 임박했음에도 운동도 제대로 못하고 으아 저거 빨리 진도 빼야 되는데- 밖에 생각을 못하고 있었으니 이걸 다행이라 해야 하나. 다른 사람들은 출산후기 찾아보면서 부들부들 긴장도 하던데 나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심지어 어제 저녁엔 혹시 양수가 터진 게 아닌가 싶은 아찔한 순간이 있었는데도 제일 먼저 생각한 게 아아, 안돼- 내일 짧은 마감이 있는데 어떻게 해결하지. 빨리 집에 가서 처리해야겠다... 였음.

병원에 전화했더니 일단 그냥 분비물일 수 있으니 배가 아프거나 다시 그런 증상이 반복되면 병원으로 오라고 해서 내가 한참 일을 하는 동안 신랑은 빨래를 돌리고 출산가방을 싸고.. <-아직도 안 싸고 있었음-_-; 뭐 그런 밤시간을 보냈다. 나는 뱃속의 변화에 신경을 곤두세우면서도 키보드 두드리느라 정신이 없었고. 하지만 밤새 평소보다 더 활발하게 움직였던 걸 보면 걱정하지 말라는 신호를 보내준 건가 싶기도 하더라. 

그래도 확실히 이제 곧 나오겠다 싶은 생각이 드는 게, 지난주 금요일에 병원에서 37주 태동검사를 했을 때 뭉침이 있긴 하지만 아직 애가 나올 정도는 아니라고 했었는데 그 뒤에 다시 눈에 띄게 배가 처졌고 뭉침도 훨씬 잦아지고 길어졌다. 아래로 눌려서 그런지 그간 못 가던 화장실을 거의 일주일동안 매일매일 가고 있고. 가진통이랄 건 없었는데 내가 둔해서 그런가 싶기도.

어젠 오랜만에 옷구경을 하러 나갔다가 딱 있으면 좋겠다 싶은 케이프코트를 발견하고는 살까말까 망설였는데, 언니한테 그 얘길 했더니 "니가 아직 현실을 모르는구나." 라고 한다. 침 질질 흘리는 아기를 안고 케이프코트 같은 걸 입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냐며. 갑자기 슬퍼져서 그렇다면 나에게 가능한 사치란 무엇인지에 대해 토론한 결과 대충 아래와 같은 결론이 나왔다.

1. 화장품류
출산 후에는 머리가 많이 빠진다고 하니 좋은 샴푸. 옛날옛적에 선물 받은 트리트먼트와 함께.
스킨케어는 현재 샘플 소진 중이라 어제 출산가방 싸면서도 으아악 어떡하지 하다가 신랑이 쓰는 튜브형 세타필 크림을 넣어 두었는데, 어젯밤의 사건 이후로 외출하기는 좀 겁이 나서 강남 신세계까지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평소 쓰는 아모레퍼시픽 화이트닝 에센스+대량의 샘플들. 조리원에서 쓰기 편하게 토너/크림류/폼클렌징을 넉넉히 받는 게 현재의 계획이다.

2. 관리
한동안 베네피트 브라우바에 다니면서 상당히 만족하고 있었는데 임신한 동안은 관리를 받으면 안 되는 거라 지레 짐작하고 몇 달 동안 발길을 끊었다. 관리 받기 전에 작성하는 동의서에 임신 중이다, 라는 체크항목이 있길래 안 되는 줄. 봄이 되면 백화점이 가까운 동네로 이사를 가니 그 때부터는 가끔 브라우바를 애용해 보기로 결심. 눈썹은 생각보다 얼굴에 큰 영향을 미치더라.
그리고 올해 여름에 슬펐던 것은 맨발톱을 내놓고 다닌 것. 붙이고라도 다녀볼까 했는데 때마침 그 때 발톱에 문제가 생겨서 데싱디바를 사놓고 써보지도 못했다. 원래도 키보드를 많이 써서 손톱은 젤네일도 닳아 없어질 지경이라 발밖에 관리를 못 받았는데 이건 설마 다시 할 수 있겠지.

3. 잡화류
귀걸이는 외출할 때만 하니까 패스하고-언니 말로는 딱 붙는 건 괜찮다고 하지만-, 반지도 결혼반지 빼고는 못 할 거 같고, 목걸이도 잡아당기니까 6개월 이후엔 하기 힘들 듯하다. 머리는 이미 단발이고.
그러다 보니 남는 게 신발류밖에 없는데, 다행히 요즘 하이힐은 신지 않으니 운동화, 슬립온, 낮은 부츠, 단화 등등을 신으면 될 듯. 모카신이나 양털 슬립온을 노리는 중이다.
 
4. 그럼 옷은?
겉옷은 패딩이나 야상류. 나머진 뭐가 묻어도 괜찮을 만한 막 빨아 입을 티셔츠 정도? 비교적 하의는 자유로움.
패딩에 달린 털들을 떼고, 하나밖에 없는 야상은 좀 보충하고. 운동 열심히 해서 새로운 몸으로 거듭나 보자! 라는 것이 나의 포부이나 출산 후의 상황은 아무도 알 수가 없겠지.

지금으로선 아기한테 좋은 걸 해주느라 허덕이기보다는 스트레스 덜 받고 최대한 덜 힘든 길을 찾아보자 주의라, 무리를 하면서까지 모유를 고집하지도 않을 것이고 아기한테 필요한 것보다 내 선물을 받고 싶은 사람이 나다. 과거에 내가 그랬듯이 주위 사람들은 만만하게 아기옷 같은 거나 선물하겠지 싶어서.
내가 임신기간 동안 느낀 건 생명의 경이로움은 아니었고 '나에게도 생식의 기능이 존재하고 있었군', 하는 정도의 건조한 신기함에 가까웠다. 지금 뱃속에서 움직이는 것이 정말 인간아기가 맞는지도 아직 실감이 잘 안 나는 지경이라 그 부분은 여전히 신기하다.

출산 직후의 위시리스트로는
배 깔고 누워보기. 5개월 이후로 엎드린 적이 없어서 매우 엎드리고 싶다! 옆으로 누워 자는 거 지겨워 죽겠음. 난 똑바로 누워 자는 것도 전혀 불편하지 않은데 그러지 말라고 뉴스에서 떠들썩했다던가... 분명히 사람마다 다를 텐데 하지 말라고 하니 일단 하지 말자 싶어서 매우 불편하게 밤마다 오른쪽으로 누웠다 왼쪽으로 누웠다 하는 중. 하루에 하는 움직임 중 이게 제일 힘든 것 같다. 방향 바꿀 때마다 낑낑거리니. 엎드리는 게 배 밀어넣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 연장선상일지도 모르지만, 조리원에서 마사지 실컷 받기. 원래 마사지 받는 건 좋아하고 이 또한 체중감소와 자궁수축에 도움이 많이 된다고 하니 받을 수 있을 만큼 받아보겠다. 

뱃속에 있을 때가 제일 편하다고는 하나.. 나같은 성격이면 내 몸이 가볍고 내 핏줄의 실체를 확인하면서 지내는 게 훨씬 나을 것 같기도 하다.
36->37주에는 다행히 얼마 안 크긴 했지만 크리스마스가 되기 전에 만나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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